2000 시드니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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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제 27회 하계 올림픽으로 1956 멜버른, 1964 도쿄, 1968 멕시코시티, 1988 서울에 이어 다섯 번째로 개막식의 날짜가 9월 이후였던 올림픽이다.[1] 이후의 올림픽들은 다 7~8월에 개막하면서 아직까지는 9월 올림픽이 나오지 않고 있다.
'''20세기의 마지막 올림픽'''[2] 이기도 하다.
2. 유치
1993년 9월 24일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개최지가 결정되었다. 개최지 투표에서 1,2,3차 모두 중국 베이징이 1위를 하다가 시드니와 최종 결선에서 43:45로 아슬아슬하게 시드니가 채택되었다. 투표 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3차에서 떨어진 영국 맨체스터의 표가 같은 영연방 국가인 호주 시드니로 몰린게 가장 큰 이유. 물론 중국은 이를 식민주의자들의 음모라느니, 아무 문제도 없는 인권논란에 따른 것이라고 강하게 규탄했다. 사실 불과 5년전에 올림픽을 개최했던 한국이 개최 당시에 학살, 언론인, 정치인 탄압. 강제수용소 수용 등의 막장짓거리들이 버졋히 벌어졌음에도 올림픽 개최에 성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배가 아플법하기는 했다.
사실 인권 문제도 영향을 아주 안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1993년이면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이 일어난지 겨우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리 중국이 떠오르는 강국이고, 상업적인 이익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런 요소가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반대로 시드니는 꾸준히 고정표를 확보한 후, 마지막에 영연방의 표 및 중국에 대한 묘한 거부감이 있는 나라들의 표를 잘 흡수했던 것이 컸다. 또, 남반구에서 오랜만에 올림픽을 열어야 한다는 명분도 나쁘지 않았다.
3. 진행
환경친화적인 올림픽이기도 했다. 사격장 양궁장을 가건물로 지었으며, 버스도 천연가스를 연료로 쓰는 버스를 운행했다. 그리고 올림픽 건물 있는 곳까지 시티레일 전철 노선이 신설되어 운행을 개시했으며, 2017년 현재도 멀쩡히 잘 다니고 있다. 당연히 전동차를 투입해서 운행했으며 건설 자체도 최대한 환경을 배려해서 기존 노선을 최대한 활용하고 일방향으로 운행하게 하여 공사비를 절감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썼다.
위에 적힌대로 시설 운영면에서는 꽤나 좋았던 대회였지만, 약물파동과 심판들의 판정 문제가 제기되었고 한국도 미국과 경기했던 야구 준결승전과 레슬링의 금메달 유망주 김인섭이 말도 안되는 판정 문제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불친절한 자원봉사단 또한 문제가 되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던 1976 몬트리올 올림픽과는 달리 1억 달러의 적자로 선방했다.
개최전 독립해서 신생국이 된 동티모르가 이 대회에 최초로 참여했으며[3] , 호주 원주민 출신 캐시 프리먼이 육상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여담으로 프리먼은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호주 총리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분노어린 비난을 하기도 했다.
'''사상 처음으로 남북한이 동시에 입장한 대회.''' 주경기장에 아리랑이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남북한이 '코리아'라는 명칭으로 함께 입장한다는 멘트가 프랑스어와 영어로 방송되자 모든 관중들은 물론이고 이미 입장해있던 다른 국가의 선수단 일부도 박수를 쳤으며, 귀빈석의 호주 정부 관계자들과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도 밝은 표정으로 환영했을 정도.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남북정상회담과 맞물려 큰 감동을 선사했으며, 최초로 한반도기가 올림픽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건 덤이다. 역사적인 남북한 공동입장의 순간
이번 올림픽부터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경기)와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휠체어 레이싱과 체스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의 경우는 첫대회에서부터 체급제한[4] 이 걸려있었지만 패자부활전 승자 간 동메달 결정전까지 진행을 하였다. 이것은 다음 올림픽인 2004 아테네 올림픽까지 이어졌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부터는 패자부활전 승자와 준결승 패자 간에 동메달 결정전을 치러 두 명에게 동메달을 주는 형식으로 변경이 되었다.
수영에서는 화젯거리가 두 가지 있었는데, 첫번째는 적도 기니의 흑인 선수 무삼바니의 독특한 수영 폼 + 막장경기#를 들 수 있다. [5] 자세한건 영상을 보면 한번에 감이 잡힐것이다. 그리고 이안 소프가 자유형 400m 계영 400m 계영 800m등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 인간어뢰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 때 호주의 선수들이 처음으로 전신수영복을 선보이며 메달을 쓸어갔는데, 이는 스포츠에 기술이 어디까지 관여되어야 하냐는 논쟁으로까지 이어졌고, 이후 수영복에 대한 규정이 조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단거리 스프린터 메리언 존스는 여자 100미터와 200미터를 동시석권하는 등 3관왕이 되어 단거리 여제로 부상했다. 하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한 것이 도핑에 걸려 모든 기록이 취소되었고 당연히 메달도 모두 박탈당했다. 원래대로라면 금메달은 2위 선수에게 승계되었어야 했겠지만... 100미터에서 원래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그리스의 에카테리니 타누 선수도 훗날 도핑에 걸렸다(...). 그것도 자국에서 열리는 2004 아테네 올림픽 개막 직전에... 시드니 올림픽 당시는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어쨌든 불명예를 뒤집어쓴 선수를 금메달리스트로 승격시켜주긴 어려웠던지라 해당 대회의 100미터 우승자 기록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대신 동메달을 딴 선수는 은메달로, 4위를 한 선수는 동메달로 승격되었다.
여자 수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최초의 대회이기도 한데[6] , 이를 관전하던 전세계 인류가 컬쳐 쇼크를 받게된다. 경기의 특성상 몸싸움이 많이 발생하고,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의 경기에서 선수들의 수영복이 벗겨지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 심지어 수영복이 아예 찢어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 덕분(?)인지 여자 수구 종목은 이후 대회에서도 제외되는 일 없이 치러지고 있다.
한편 이번 대회에서 중국은 종합성적 3위로 뛰어오르며 종합성적 1위 미국과 종합성적 2위 러시아와 더불어서 새로운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 올림픽에선 폐막식을 빼놓고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폐막식에서는 호주의 국민스타 카일리 미노그가 호주 대표 가수로서 폐막식 공연을 담당 하여 ABBA의 Dancing Queen을 불렀다. 노래 자체가 일단 전 세계적인 명곡임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인데다, 카일리 미노그의 독특하고 화려한 무대 의상과 부드러우면서도 시원시원한 안무가 곡과 폐회식 분위기와 상당히 잘 맞아 떨어져, 당시 전 세계 선수단들과 관객들의 열띤 반응을 얻었고 지금까지도 올림픽 역사상 가장 멋진 폐회식 공연으로 기록된다. 2000년 당시 새천년을 맞은 낙관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낙관주의는 오래가지 못하고 2년뒤 열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상당히 대조적인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4. 대한민국 선수단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8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0개, 총 28개의 메달을 따냈다. 대한민국의 첫 메달은 여자 사격 소총 은메달을 획득한 강초현 선수로 시작되었다. 또한 유럽의 전유물이었던 펜싱에서 현 대한민국 남자 에페 국가대표팀 코치인 이상기가 에페 남자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따내고, 이어서 김영호가 플뢰레 남자 개인전 금메달을 따냈고, 메달을 따지 못하였으나 남자 에페 단체전도 4위를 기록하였다. 필드 하키에서는 네덜란드와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며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또 야구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동메달을 취득하였고 이후 국제대회에서 야구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구대성은 3/4위전에서 일본 타선을 막아내며 일본킬러란 타이틀이 생겼다. 여자농구는 예선전에서 러시아를 격파했고 쿠바, 프랑스 등 쟁쟁한 팀들을 물리치고 16년만에 4강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뤄냈다. 비록 동메달 결정전에서 브라질에 연장끝에 패하면서 메달획득에는 실패했지만 4강에 오른것만해도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 대표팀과의 예선전에서도 단 14점 차, 4강전에서 13점 차로 패하는 등 경기내용 면에서도 매우 훌륭했다. 레슬링의 심권호는 이번 대회에서 체중을 불리면서까지 2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는 기적을 일궈냈다. 양궁에서는 여자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은 물론, 개인전에서도 금, 은, 동을 차지하였다. 또한 사이클의 조호성은 비록 메달을 따내지는 못했지만 40km 포인트 레이스에서 4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한국 사이클 사상 올림픽 최고 성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성적도 다들 좋은 편이었던지라 종합 12위에 그치며 1984 LA 올림픽 이후 가장 낮은 종합순위를 기록했다. 사실 이 대회는 역대 올림픽 중 유일하게 유일하게 10개국 이상의 국가가 금메달 10개 이상을 획득했던 대회였다. 실제로 한국보다 금메달을 더 많이 획득한 국가 중 영국은 한국과 총 메달 개수에서 동률을 이뤘고, 쿠바와도 총 메달 개수에서 1개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루마니아와 네덜란드는 오히려 한국보다 더 적은 메달을 획득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반적으로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7]
4.1. 축구 대표팀의 불운
'''조별리그 2승 1패하고 광탈했다.'''[8] 조별리그 1차전 스페인전 0-3 떡실신이 시발점이었다. 2차전 모로코와 3차전 칠레 경기 모두를 1-0으로 잡긴 했지만 그러고도 골득실이 마이너스가 나면서 모로코를 4-1,스페인을 3-1로 이긴 칠레가 2승 1패지만 7득점 3실점으로 골득실에 앞서 1위, 스페인이 6득점 3실점으로 2위로 진출했고 2득점 3실점인 한국은 탈락했다. 후일 종목은 다르지만 유사한 타이중 참사와의 유사성도 엿보인다. 2승 1패하고 조별리그 예선 탈락을 한 국내 최초의 사례.[9] 여담인데 스페인은 대회 은메달(금메달은 승부차기 끝에 카메룬[10] ), 칠레는 대회 동메달을 받았다.
4.2. 야구 대표팀의 선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선발로 내세운 일본을 3대1로 꺾고 동메달을 획득한다. 쿠옹의 9이닝 1실점 완투승이 눈부셨던 경기였다. 이승엽이 8회 2사 2,3루에서 결승 2타점 2루타를 때려내며 후배 여럿을 구해냈다.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올림픽에서 획득한 첫 메달이다. 8회말 2사 2,3루 풀카운트에서 마쓰자카는 이전타석에서 이승엽을 삼진 3개로 돌려세운 자만심에 결정구로 한가운데 패스트볼을 꽂다가 좌중간 2루타를 얻어맞았다[11] . 선발투수 구대성은 경기 전 날 어깨에 담에 걸리는 바람에 1~2회까진 전력투구를 하지 못하였다. 당시 한국 엔트리엔 유일한 대학생 정대현(경희대 4학년)이 포함되어 있었다.[12] 그리고 그는 2015 WBSC 프리미어 12까지 대표팀에 선발되는 등 야구대표팀의 살아있는 화석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와 김응룡호/2000년 문서 참조.
4.3. 성적
■ 2000년 27회 시드니 올림픽 (2000 Summer Sydney Olympics)
- 기간 : 9월15일~10월1일
- 종목 : 근대5종, 농구,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복싱, 사격, 사이클, 소프트볼, 수영, 승마, 야구, 양궁, 역도, 요트,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탁구, 태권도, 테니스, 트라이애슬론, 펜싱, 하키, 핸드볼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112명, 선수286명 참가.(농구,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야구, 양궁, 역도,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탁구, 태권도,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금메달 8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0개 획득. 종합순위 12위.
- 금메달 : 레슬링(그레코로만형 54kg) 심권호
- 금메달 : 남자 양궁(단체) 김청태, 오교문, 장용호
- 금메달 : 여자 양궁(개인) 윤미진
- 금메달 : 여자 양궁(단체) 김남순, 김수녕, 윤미진
- 금메달 : 남자 태권도(86kg) 김경훈
- 금메달 : 여자 태권도(57kg) 정재은
- 금메달 : 여자 태권도(67kg) 이선희
- 금메달 : 남자 펜싱(플러레) 김영호
- 은메달 : 레슬링(그레코로만형 58kg) 김인섭
- 은메달 : 레슬링(자유형 76kg) 문의제
- 은메달 : 남자 배드민턴(복식) 유용성, 이동수
- 은메달 : 여자 사격(공기소총 10m) 강초현
- 은메달 : 여자 양궁(개인) 김남순
- 은메달 : 남자 유도(60kg) 정부경
- 은메달 : 남자 유도(81kg) 조인철
- 은메달 : 남자 체조(평행봉) 이주형
- 은메달 : 남자 태권도(68kg) 신준식
- 은메달 : 남자 하키
- 동메달 : 레슬링(자유형 63kg) 장재성
- 동메달 : 남자 배드민턴(복식) 김동문, 하태권
- 동메달 : 남자 야구
- 동메달 : 여자 양궁(개인) 김수녕
- 동메달 : 여자 유도(63kg) 정성숙
- 동메달 : 여자 유도(70kg) 조민선
- 동메달 : 여자 유도(78kg) 김선영
- 동메달 : 남자 체조(철봉) 이주형
- 동메달 : 여자 탁구(복식) 김무교, 류지혜
- 동메달 : 남자 펜싱(에뻬)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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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IOC 파트너 삼성전자는 해당 대회를 기념해 기존 애니콜 듀얼폴더(SCH-A350)에 올림픽 휘장을 달고 금/은으로 도금한 '올림픽 에디션'을 출시했고, 애니콜 구입고객 100명을 '시드니 응원단'으로 선발하는 이벤트를 펼쳤다. 심지어 일간스포츠, 호주대사관과 공동으로 첫 '애니콜 리포터'를 선발하기도 했다.
- 톰 클랜시의 소설 레인보우 식스에서 배경으로 등장. 급진 생태주의에 빠진 미국의 백만장자가 자신 소유의 보안업체를 통해 올림픽 폐막식 때 스프링클러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살포하여 인류를 멸종시키려고 시도한다.
- 이 때부터 올림픽 야구에서 알루미늄 배트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 이 올림픽이 진행중일때 둘째 딸을 얻은 어느 남성은 올림픽에 심취했던 나머지 올림픽을 일본어로 음차해서 이름을 지었다. 주작같겠지만, 실화다.
- 이 대회에 출전한 동티모르 육상선수 아귀다 아마랄의 얘기는 2002년에 나온 제7차 교육과정 도덕 5학년 교과서에 실렸고, 2018년 9월 9일, 에릭 무삼바니라는 선수의 얘기가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방영되었다.
- 시드니 올림픽이 열리기 전인 2000년 9월 6일, 일본의 밴드 자드는 일본 NHK 방송 올림픽 주제가로 채택된 Get U're Dream을 불렀다.
[1] 9월이라고 해도 남반구라 초봄에 열려서 겨울에 가까운 올림픽이다.[2] 하계로써도 마지막이고, 하계와 동계 통틀어도 마지막이다. 20세기 마지막 동계 올림픽은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이다.[3] 정확히는 올림픽기를 들고 독립 선수단으로 참가했다. 당시에는 아직 독립하기 전이었으며, 정식 독립은 2002년에 이뤄졌다.[4] 총 8체급이 있으나 한 국가에서는 성별로 최대 2체급, 체급당 1명씩의 선수만 참가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한국의 독식을 막기위해 만들어진 규정이지만 첫대회에서 금3, 은1개를 획득했고 베이징에서는 전부 금메달을 획득해갔다. 이 규정이 걸린 덕분에 여러국가에서 메달을 골고루 획득하는것이 가능해졌다. 비슷한 제한이 걸려 있는 종목으로 여자 역도가 있다. 2016 리우 올림픽부터는 체급별 올림픽 랭킹에 따라 올림픽 출전권을 부여하게 되어 이론상 한 국가가 전 체급에 출전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대한민국은 이 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태권도에 5명을 출전시킬 수 있었다.[5] 사실 에릭 무삼바니의 경우 정식 경기는 아니고, 초청 받은 선수다. 수영 실력은 아마추어나 다름없었는데, 하필 함께 경기했던 선수 두 명이 부정출발로 실격하는 바람에 혼자 레이스를 펼친다. 남들이 기록을 위해 뛸 때 이 선수는 빠져 죽지 않으려고 수영한 셈(...) 다른 선수들이 레오타드형 수영복을 입은 반면에 혼자 독특하게 트렁크 수영복을 입고 나왔다(...) 현재는 기니의 수영 국가대표 코치로 일하고 있다.[6] 참고로 남자 수구는 제2회 1900 파리 올림픽 때부터 치러지던 유서깊은 종목이다.[7] 여기에는 당시 IMF 외환위기라는 시대적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이 무렵에 스포츠팀들이 연쇄적으로 해체되었다.[8]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듬해인 2001년에도......[9] 대외적으로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일본이 똑같이 2승 1패를 거두고도 조별리그에 탈락한 선례가 있다. 당시 일본은 브라질을 1-0으로 이겼지만 나이지리아에게 0-3으로 지면서 브라질, 나이지리아에게 골득실로 밀려 탈락했다. 그리고 바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또 조예선에서 브라질을 만나 0-1로 지고 2승 1패를 거뒀으나 2위로 8강에 올랐다. 그러나 미국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해 탈락한다. 여담으로 1996년 저 당시에 일본을 3-0으로 털었던 나이지리아는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감독이 다름아닌 조 본프레레...[10] 이 당시에 카메룬의 금메달에 기여한 선수가 다름아닌 사무엘 에투다.[11] 당시 중계를 맡았던 MBC의 허구연 해설위원 역시 마쓰자카가 무모한 도전을 했다고 평가했다.[12] 정대현은 많은 야구 팬들 및 기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미 군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병역특례와는 무관했다.